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
회사에서 동아리로 진행하는 독서 모임에서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이 선정되어 읽게 되었다. 일단 여러 책중에 제목이 가장 끌리고 많이 들어본 작가 이름 때문에 투표하였다. 책을 읽으면서 어디서 들어 봤나 생각해 봤더니, 기억이 나지 않아서 검색해 보았더니 자유로부터의 도피
를 쓴 작가였다. 이 책도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이 멋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같은 작가라니 제목을 뽑아 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작가라 생각이 들었다.
일단 책을 읽고 나니 내가 결혼을 하기전, 사랑을 하기전에 이 책을 읽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책이 많이 좋았고 기억에 남는 구절이 많았다. 이 책은 제목만 봐서는 이성을 유혹하는 법이 나올 것 같지만 그런 내용은 나오진 않는다. 여러 학문과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며 사랑을 이야기 한다. 한 마디로 요약 하자면 사랑도 기술처럼 학습해야 하며 이를 훈련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남 들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뤘지만 내가 정말 와이프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었다. 와이프를 싫어 한다거나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와이프가 나의 진정한 사랑
일까 라는 멍청한 생각이 말이다. 이런 생각은 다음 문구를 보고 참 멍청한 생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사랑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는 배경이 되는 두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솔직히 말하면 와이프는 어릴 적 부터 꿈꿔왔던 이성은 아니다. 나는 와이프를 대상으로 생각하고 멍청한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위에 생각은 어떻게 보면 나에게 또다른 사랑이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나는 와이프 말고 다른 사랑을 탐닉 또는 흠모 했었던게 아닌가 싶다. 나는 고전 연애 소설(?)을 꽤 즐겨 읽는다. 거기서 나온 눈물 나오도록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랑에 비하면 나의 사랑은 단촐하고 비교하지도 못 할만큼의 사랑이기에 이런 생각을 가진것 같다. 허구의 사랑을 보며 현실의 사랑과 비교하는 멍청한 짓을 한것이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 중략 ..
주는 것은 박탈 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 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와이프는 나를 사랑한다. 나 뿐만 아니라 나와 와이프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와이프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 이는 와이프가 사랑을 표현하고 이를 행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와이프는 주는 사람이며 나는 받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나도 마냥 받는 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100을 받는 다면 70정도 주는게 아닐까 싶다. 이러면에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스스로 돌다한 성숙도와는 관계 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로 다시 한번 생각 하게된다. 나는 아직 미성숙하며 책에서 줄곧 말했다 시피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잘 모른다. 와이프는 이런 미성숙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며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와이프에게 감사함과 따뜻함, 사랑의 마음을 다시한번 느끼며 다시한번 되돌아 보게 된것 같다.
이 책에는 마음에 와닫는 구절이 참 많았다. 거의 한권의 명언집 같은 느낌이다. 읽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좋은 책을 읽었고 독서 모임을 하길 잘하였다. 이런 책을 접할 수 있게 해준 모임에 감사함을 전한다. 아래는 내가 밑줄 그어 놓은 인용구이다.
사랑의 경우, 포기는 불가능하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치하도록 "강요받는"정도 이상으로 일치하기를 "바라고있다". 대부분
의 사람은 일치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
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
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하느님은 요나에게 무언가를 위해서 "일하고", "무엇인가를 키우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며 사랑과 노동은 불가분의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즉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곧 불합리하게 일그러진 상을 극복하려면,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어머니가 "젖"은 줄 수 있으나 "꿀"까지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
한 사람이어야 한다.
사랑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것이다.